人間失格 (The Fallen Angel, 2010) - 인간실격

어째서 천재들은 일찍 요절 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을 하는걸까 ...
다자이 오사무 .... 입버릇처럼 하는말 .."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 참.. 마음아픈 말이다 ...
자신의 인생을 죽울때 까지 자학했던 그 ...
인간의 나약함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 . 그의 유작인 동시에 자서전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님이 그린 인간의 상실감과 소외의식 .. 뭔지모를 안타까움과
내 마음 한쪽에숨어있는 .. 타락함이 꿈틀거림을 느꼇따 ..
부모로부터의 무관심 ..가족으로 부터의 배척 .. 기존 사회로의 추방이라는 자기 비하적인 의식
감옥 ..죽음 직전 몇년간의 안정적인 생활 .. 그리고 죽음 ....
네 차례 자살미수 끝에 5번째 ..동거녀와 함께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함 .
너무나 순수했기에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수없었던..
인간이 두려워 세상의 무리에 섞이기 위한 방편으로 .. 익살이라는 허위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요조 ..
세상의 기준치에 맞추기 위해 .. 우리는 서로를 짓밟고 어느정도의 나를 감춘채 살아 가지않는가 ..
서로 속이면서 ..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개인과 개인과의 투쟁 속에서 살아남기위해 ... 거짓된 표정으로
일관하며 .... 그게 바로 세상사람들의 삶이지않은가 ...
오사무는 자신의 자화상을 도깨비라고 부른다 ..
반고흐의 작품이 생각나는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듯한 암울해보이는듯한 어두운 유화그림 ..
왠지 ... 빈센트 반고흐의 귀를 자른 모습과 .. 자살로 이어지는 삶이 스쳐가는데 .. 극중 요조의 삶을 암시해 주는듯햇다 ..
서점에서 요조가 빼든 시집 나카하라츄야의 생전 출간된 시집 " 山羊の歌 " 이시집을 꺼내들어 읽는 요조 뒤에 서서히 나타나는 " 보요 ~보요 ~ ボ-ヨ-ボ-ヨ-" 실존인물 나카하라 츄야의 등장 ..
원작에는 등장하지않은 인물의설정
다자이 오사무와 동시대를 살았던 요절한 천재시인 나카하라 츄야 의 등장은 요조의 환영이자
타락한 인간의 구원 정도로 생각하면될듯하다
츄야는 항상 스스로를 삐에로 라고 말하며 현실에 녹아들지 못하는 마음을 투영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듯한 느낌의 눅눅한기분이 드는 터널 속의장면 ..
숨소리조차 들리지않는 조용한 터널속에서 터널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입으로 받아 삼키는 츄야 .,
이어서 떨어지는 희미한 불꽃을 뿜어내는 작은 불씨 또한 혀끝으로 받아 삼킨다 ..
어떤의미일까 ?? .... 잠시동안 요조 처럼 나도 멍~한 상태가 되었다 .ㅎㅎ
그가 남기는 메세지 ..
ぼうよう(茫洋·芒洋 망양)은 前途茫洋(전도망양)의 茫洋·芒洋 망양이라고 영화속에서 말한다
前途茫洋 앞날 ,미래란 인간이 예측할수없을만큼 넓고 먼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ぼうよう - 끝없이 너른모양 , 갈피를 잡을수없는모양 ..
보요 ~보요 ~ 그리고 흩날리는 해당화 ~~
츄야가 항상 읊조리던 보요 보요 ~ 라는 말의 의미는 죽음을 가까이둔 얼마남지않은 생을 예감케
하는 비극적인 유머 즉 죽음 의 의미라는것을 알수있다 ..
오랜시간뒤 츄야의 죽음을 전해들은 요조는 터널을 다시 찾아
술은 희극 , 위스키는 비극 이라는말과함께 그에게 술을 바친다 ..
그리고 츄야가 했던것처럼 물방울을 받아먹으뒤 불씨를 받아먹으려 애쓰지만 결국 불가능했다
"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불안 ..
저는 그불안 때문에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
"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개 있는데 ..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않을까 ..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 "
" 서로 속이면서 .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 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
" 내게 냉철한 의지를 주십시오 .. 내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
인간이면서 인간을 밀어 젖힌다 해도 죄를 묻지 마시고 내게 분노의 마스크를 주십시오 .. "
" 나는 눈물을 믿지않는다 .. 새볔 ..세시 책장에 앉아 할렐루야 란 목소리에 툭 .. 눈물샘을 열고 마는
무신론자의 눈물을 믿지 않는다 .. "
"그리하여 그 다음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된다 .
즉 ..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않는다 .
앞길을 막는 방해꾼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
"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 하는 법입니다 ..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것입니다 ..
행복에 상처를 입는일도 있는겁니다 .. "
다자이 오사무 ..about ...
다자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아오모리 현(靑森縣) 기타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로, 아버지는 그 지방의 대지주이며 귀족원(중의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8남매 중의 막내로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열등 의식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도 모른 채로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다자이는 고등학교 시절 동인 잡지에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위선을 폭로한 『무한 나락』을 발표했으며, 3학년 때인 1929년에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벌였다. 1930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이후로 사제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도쿄로 찾아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게 되나, 그 때문에 다자이는 고향의 가족들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하였다. 분가 제적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의 다자이가 비합법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구도 에이조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좌익 운동에 가담하였고, 당시의 작품인 『지주 일대』와 『학생군』은 착취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구도가 검거된 이듬해에 자수한 이후로 비합법 운동에서 탈락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 집으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긴자(銀座) 카페의 호스테스와 함께 가나가와 현 에노 섬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다자이만 살아남아 가마쿠라(鎌倉)의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자살에 관하여는 『도쿄 팔경』『인간실격』『광언의 신』『허구의 봄』『광대의 꽃』등에서 다자이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다. 다자이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때의 체험 역시 평생 동안 죄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퇴원 이후의 다자이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할 가망이 없게 되자 미야코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응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한다. 그 후 1935년 가마쿠라의 산중에서 혼자 자살을 기도하고, 결국 미수에 그쳤다. 같은 해 ‘일본낭만파’에 합류하였으며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하지만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한다. 그 후 복막염으로 입원했고,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선보이기도 한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1936년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쓰요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두 사람은 미나카미(水上) 온천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이 자살도 미수로 끝나고, 마침내 하쓰요와 결별한 다자이는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1939년 미치코(石原美知子) 부인과의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다자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며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가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부악백경』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전쟁에서 패하여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무뢰파 작가로서, 이른바 '유행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쌓여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다자이의 최후는 비참했다. 폐의 질환이 악화되어 각혈은 물론, 계단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지경에 이른 다자이는, 1948년 6월 13일 밤 동거 중이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 강 수원지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는 닷세 후인 19일 아침, 썩어 짓무른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이 바로 다자이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다자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아오모리 현(靑森縣) 기타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로, 아버지는 그 지방의 대지주이며 귀족원(중의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8남매 중의 막내로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열등 의식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도 모른 채로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다자이는 고등학교 시절 동인 잡지에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위선을 폭로한 『무한 나락』을 발표했으며, 3학년 때인 1929년에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벌였다. 1930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이후로 사제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도쿄로 찾아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게 되나, 그 때문에 다자이는 고향의 가족들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하였다. 분가 제적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의 다자이가 비합법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구도 에이조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좌익 운동에 가담하였고, 당시의 작품인 『지주 일대』와 『학생군』은 착취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구도가 검거된 이듬해에 자수한 이후로 비합법 운동에서 탈락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 집으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긴자(銀座) 카페의 호스테스와 함께 가나가와 현 에노 섬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다자이만 살아남아 가마쿠라(鎌倉)의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자살에 관하여는 『도쿄 팔경』『인간실격』『광언의 신』『허구의 봄』『광대의 꽃』등에서 다자이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다. 다자이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때의 체험 역시 평생 동안 죄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퇴원 이후의 다자이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할 가망이 없게 되자 미야코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응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한다. 그 후 1935년 가마쿠라의 산중에서 혼자 자살을 기도하고, 결국 미수에 그쳤다. 같은 해 ‘일본낭만파’에 합류하였으며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하지만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한다. 그 후 복막염으로 입원했고,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선보이기도 한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1936년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쓰요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두 사람은 미나카미(水上) 온천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이 자살도 미수로 끝나고, 마침내 하쓰요와 결별한 다자이는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1939년 미치코(石原美知子) 부인과의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다자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며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가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부악백경』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전쟁에서 패하여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무뢰파 작가로서, 이른바 '유행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쌓여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다자이의 최후는 비참했다. 폐의 질환이 악화되어 각혈은 물론, 계단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지경에 이른 다자이는, 1948년 6월 13일 밤 동거 중이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 강 수원지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는 닷세 후인 19일 아침, 썩어 짓무른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이 바로 다자이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다